통일부 "김여정 이례적 반응…국제적 위신 의식해 대응 격 높여"
보복 예고 대신 "재고할 문제"…전문가 "북미 접촉 기대·활용 의도"
미국이 바이낸스 해킹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한 가운데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이례적으로 반발 담화를 발표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북한이 국제적 위신을 의식하는 동시에 향후 북미 대화 가능성도 고려해 대응 수위를 조절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미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구체적인 보복 조치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이버 해킹 문제가 협상의 새로운 압박 카드로 부상하는 것을 차단하면서도 대화의 문은 열어두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문제 제기에 김여정 부장이 반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바이낸스 해킹 사태의 국제적 파장이 확산하자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 대응의 격을 높인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그동안 사이버 범죄 의혹이 제기될 때 주로 외무성이나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입장을 밝히거나 침묵해왔다. 지난해 2월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비트에서 15억 달러 상당의 자산이 탈취됐을 때도 별도의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김 부장이 직접 담화를 발표한 배경에 대해 “최근 북한이 정상국가를 표방하며 외교적 외연을 넓히는 상황에서 국제적 위신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 부장은 이날 관영매체를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해킹 배후에 북한이 연루돼 있다는 주장에 대해 “황당무계한 낭설”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이를 “엄중한 정치적 도발”이자 “반공화국 주권침해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워싱턴의 대조선 적대적 자세를 다시금 확인했다”며 “여러 측면에서 재고해볼 문제들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는 담화에 구체적인 대응 조치가 담기지 않았고, ‘재고해볼 문제’라는 유보적 표현이 사용된 점에 주목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담화만 놓고 보면 (군사적) 대응 조치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며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표현에서 약간의 여지를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북한이 북미 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불법 사이버 활동이 새로운 대화 의제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의 대미 강경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향후 대화 가능성은 열어둔 채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압박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북미 대화의 가능성을 의식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신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달 중순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러 정상 간 회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한반도 문제가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한의 바이낸스 해킹 연루 가능성에 대해 “북한이라면 북한과 이야기할 것”이라며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담화는 사이버 문제에 관한 담화라기보다 북미관계 메시지의 성격이 강하다”며 “북한이 북미 접촉을 일정 정도 기대하거나 이를 활용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도 “‘미국의 대북 적대시 태도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재고해볼 문제가 있다’는 표현은 이번 사안을 북미 대화 등과 전략적으로 연계하겠다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북한이 신속하게 반응한 데는 사이버 문제가 추가 대북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 연계 가상자산 지갑을 동결하고 자금 세탁에 이용되는 믹싱 서비스와 관련 거래소까지 제재하면 북한의 외화 조달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가상자산 지갑 동결과 믹싱 서비스 제재, 글로벌 거래소에 대한 2차 제재로 이어질 경우 북한으로서는 일정한 타격이 불가피하다”며 “자금줄이 차단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초기부터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통일부는 북한의 해킹 연루 여부와 추가 제재 동참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통일부 당국자는 “바이낸스 사건과 관련해 관계기관 사이에 관련 정보가 아직 공유된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정확한 상황을 파악한 뒤 관계부처가 대응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당장의 제재 효과와 별개로 한국도 독자적인 사이버 대북 제재에 참여해 국제 제재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범철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당장 제재의 효용성이 높지는 않더라도 제재망을 다시 되살리는 의미가 있다”며 “한국이 제재하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유럽까지 참여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