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480만t 경유 공급 계획…美 열흘치 소비량 불과
중동발 공급 차질에…"경유값 영향 제한적" 전망
러시아 재고 처분·수출 수익 확보…EU·우크라 반발
러시아가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디젤(경유) 수출 금지 조치를 일부 완화하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 경유를 공급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공급 계획은 최대 480만t에 달하지만, 실제 공급 규모와 일정이 불확실한 데다 중동발 공급 차질도 이어지고 있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유 가격을 낮추는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10일 성명을 발표해 디젤 50만t의 해외 판매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산 경유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시장에 대규모로 공급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선 30만t 이상을 공급하고, 11월 50만t과 이후 100만t을 추가로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정유시설 상황에 따라 최대 300만t을 더 공급할 수 있다고도 했다. 러시아가 단계적으로 최대 480만t을 공급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러시아 측은 전체 공급량과 구체적인 인도 일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미국 재무부는 내년 4월 7일까지 러시아산 경유의 미국 수입 등을 허용하는 한시적인 대러 제재 완화 조치를 발표했다. 미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발발 초기인 2022년부터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해 온 기존 정책을 바꾼 셈이다.
하지만 이번 합의에 따른 러시아산 경유 수출 물량이 제한적인 데다가, 중동 정세 긴장감도 고조되는 상황에서 효과는 미미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최대 공급량 480만t은 배럴로 환산하면 약 3600만 배럴이다. 미국의 하루 경유 소비량을 약 360만 배럴로 가정하면 고작 10일치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물량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도 공급될 예정이어서 실제 가격 인하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투자플랫폼 IG의 크리스 보챔프 수석 시장분석가는 “전 세계의 하루 경유 소비량이 약 3000만 배럴에 달한다는 점에서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에너지 정책 연구 재단의 저명한 연구원인 마이클 린치는 ABC에 "(러시아산 경유 공급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 의자를 옮기는 것과 같다"며 “국지적으로 가격이 약간 하락하는 정도일 뿐, 전 세계 또는 미국 전역의 가격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산 디젤 추가 공급 발표 직후 경유 관련 시장 지표는 하락했다. S&P글로벌에 따르면 10월 9일 미국 초저유황 경유의 크랙 스프레드는 배럴당 6.45달러 하락한 96.80달러를 기록했다.
크랙 스프레드는 경유와 원유 가격의 차이로, 정유사의 경유 정제 수익성을 가늠하는 지표다. 다만 이 지표의 하락이 소비자 경유 가격의 같은 폭 하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날 국제 유가는 호르무즈 해협 해상운송 차질 우려 등으로 오히려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해상 운송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중동산 정제유의 글로벌 공급이 줄어든만큼 국제 연료 가격이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8개월간 지속된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세계적인 유가 상승으로 미국 경제와 소비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점에 이뤄진 것이다.
특히 미국 경유 가격이 큰 폭 올랐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9일 기준 미국내 평균 경유 소매가는 갤런(3.78L)당 약 6.28달러로, 지난해 같은 시기의 약 3.68달러와 비교해 약 70% 높은 수준이다. 내달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유 가격 상승은 트럭 운송업체와 농민의 비용 부담을 키우고 있다. 운송비와 농산물 가격 상승이 식품을 비롯한 전반적인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릴 경우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러간 경유 합의가 러시아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 전략국제연구센터(CSIS)의 에너지 전략가이자 전문가인 클레이턴 시글은 “러시아가 겨울철에 필요한 저온용 디젤을 생산하기에 앞서 여름용 디젤 재고를 해외에 판매해 수출 수익을 확보할 것”이라고 짚었다.
한편 미·러간 '경유 합의'에 대한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반발도 거세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0일 소셜미디어에서 러시아산 디젤 제재 완화가 러시아에 전쟁 수행 자금을 더 벌어줄 것이라며 “지금은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완화할 때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EU 외무장관들이 12일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 합의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그는 "러시아가 석유제품을 판매하도록 허용한 것은 끝내야 할 전쟁을 장기화하도록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에 맞서 트럼프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엔 새 대통령이 필요하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퇴진을 압박하며 우크라이나를 향해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핵심 정보 공유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