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통역 준비하고도 접촉 요청 자제…아세안 회의장에서 우연히 마주쳐
中은 접촉 확인 피해… 11월 정상회담도 불투명
일본과 중국 외교장관이 지난해 11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대만 유사시' 관련 국회 답변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악화한 이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면 접촉했다. 정식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국제회의장에서 스쳐 지나가며 통역 없이 선 채로 짧게 대화했다. 중국은 접촉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은 채 일본을 겨냥한 '군국주의' 비판을 이어갔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기자단에게, 전날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외교장관회의 도중 왕이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겸 외교부장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양국 관계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밝혔다고 24일 보도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외교상 나눈 대화이므로 밝히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지역의 평화를 위해 일본과 중국은 큰 역할을 맡고 있다"며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외무성이 왕 부장과 마주칠 경우에 대비해 중국 담당 직원과 통역을 모테기 외무상에게 동행시켰다고 전했다. 다만 왕 부장이 접촉을 피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중국 측에 적극적으로 대화를 요청하는 일은 자제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당시 상황에 대해 "마침 아세안 관련 회의가 잇따라 열리고 있어 서로 지나치는 과정에서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중 관계 소식통은 양국 간 개별 현안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고 요미우리신문에 말했다. 중국의 태평양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훈련과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사격 훈련도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일본 외무성 간부는 "대화를 나눴다는 데 의미는 있지만,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왕 부장이 일본 측과 공식 석상에서 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왕 부장은 모테기 외무상이 참석한 공식 만찬에 나오지 않았고, 예년과 달리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에도 불참했다. 사흘간 이어진 회의에서 두 사람이 공식 일정에 함께 참석한 적은 없었다.
반면 왕 부장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중국과 대립하는 필리핀 외교장관과는 2년 만에 정식 회담을 가졌다. 아사히신문은 중국이 일본과 필리핀을 달리 대하며 일본 측의 반응을 살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중국 외교부는 두 사람의 접촉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린젠 중국 외교부 부대변인은 23일 기자회견에서 "회담 설정은 없었던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일본 측이 공개한 짧은 대화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한편 왕 부장은 모테기 외무상과 접촉한 당일 중국·아세안 외교장관회의에서 "군국주의의 부활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왕 부장 대신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화춘잉 중국 외교부 부부장도 "지역 각국은 역사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짧은 대화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도 공개 석상에서는 일본을 겨냥한 비판을 이어갔다.
왕 부장이 짧은 접촉에 응한 배경으로는 미국이 거론됐다. 중국 관영매체 관계자는 요미우리신문에 "일·중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22일 마닐라에서 기자들에게 일·중 관계가 "우려스러운 경향에 있다"고 밝혔다. 요미우리신문은 대미 관계 안정을 중시하는 중국이 미국을 의식해 일본과의 접촉에 응한 것으로 봤다.
그렇다고 이번 접촉을 관계 개선의 신호로 보기는 이르다는 평가이다. 닛케이는 중국 외교에서 대일 관계 개선의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고 진단했다. 미·중이 직접 정상·장관급 대화를 이어가면서 일본을 중재자로 활용할 필요성이 줄었다고 봤다. 지난해 11월 이후 일·중 각료급 접촉은 지난 5월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이 선 채로 대화한 것이 사실상 유일했다.
양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관계 개선을 어렵게 하고 있다. 닛케이에 따르면 2027년 가을 공산당 대회를 앞둔 중국 지도부는 일본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저자세 외교'라는 국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다카이치 정부 역시 올해 말 안보 관련 3개 문서 개정을 앞두고 보수층의 지지를 의식해야 해 중국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어렵다.
일본이 다음 접촉 기회로 기대하는 것은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 관계자는 "11월을 향해 중국 측의 온도를 미리 살펴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중국 내부에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관계 개선을 진언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 일·중 관계의 해빙은 어렵다"고 했다.
일본 정부 안에서는 일본이 배제된 채 미·중 관계 개선과 무역 협상이 진행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닛케이는 미·중 정상이 11월 APEC을 포함해 연내 세 차례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마닐라에서 선 채로 나눈 짧은 대화가 일·중 정상회담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